전남 완도에는 수많은 섬이 있습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섬도 있지만, 이름만 들어봤거나 아예
들어본 적조차 없는 작은 섬도 많습니다.
보길도와 노화도는 그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섬이다. 관광지로는 아직 덜 알려졌지만, 그만큼
조용하고, 사람보다 자연이 더 많이 말을 거는 곳. 시끄럽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공간을
찾는 이들이라면, 이 두 섬이 좋은 답이 되어줄 것이다.
보길도 – 바다와 바람, 그리고 시가 머무는 섬
보길도는 섬 전체가 시적인 공간이다. 뱃길로 20여 분, 바닷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섬에는 붉은
지붕의 민가들과 소박한 골목, 그리고 낮은 산과 잔잔한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한눈에 화려한 볼거리를 뽐내는 곳은 아니지만, 천천히 걸으며 풍경 하나하나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곳입니다.
섬을 대표하는 곳은 단연 세연정이다. 정자에 앉아 있으면 바람 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이
귓가를 간질거립니다. 윤선도가 글을 쓰며 머물렀다는 이곳은, 마치 누군가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자연스레 자리를 내어줍니다.
바로 옆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떠다니고, 연못 가장자리는 계절에 따라 다른 색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송리 해변도 빼놓을 수 없는데, 고운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은 파도에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 소리는 생각보다 묵직하고 깊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해변의 한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앉아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자갈들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말도, 아무 음악도 필요 없는 장소입니다.
동천석실로 이어지는 오솔길도 있는데, 길은 넓지 않지만, 걷기에 부족함은 없다.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바위, 들꽃 군락이 있다. 어떤 날은 고요한 길 위로 새소리만 들리고,
또 어떤 날은 구름이 빠르게 흐르며 하늘이 멋있기만 한 장소입니다.
최근 보길도에선 마을 체험 프로그램도 활발해서, 바지락 채취나 해녀 이야기 듣기, 마을 밥상
체험처럼 작지만 특별한 일정이 여행을 풍족하게 해 줍니다.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여행이 아니라, 체류에 가까운 시간. 바로 그런 시간이 보길도에서 가능하다.
노화도 – 드라이브와 풍경이 어우러지는 남도의 선물
보길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노화도가 나온다. 배를 다시 타지 않아도 되고, 차를 타고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보길도가 사색의 공간이라면, 노화도는 조금 더
살아 있는, 생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해안도로는 노화도의 백미다. 굽이진 길을 따라 바다와 나란히 달리다 보면,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하게 된다. 파도가 도로와 가까워지는 지점에서는 물안개가 도로를 타고 올라오기도
하고, 어느 구간에선 해녀가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
중간에 멈추어 서기 좋은 지점은 충혼탑 전망대다. 계단을 조금 올라야 하지만, 그 끝에서 만나는
풍경은 충분히 보상받을 만하다. 바다 위로 지는 해, 수평선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하기에 딱 좋은 장소다.
매봉산 등산로도 드라이브 대신 걷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능선을
따라 바람이 불고, 아래로는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요란하지 않은 풍경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노화도는 아직 관광 상품화가 덜 된 섬이다. 대신 로컬의 삶이 그대로 남아 있다. 포구 근처의
시장에서는 계절마다 다른 해산물이 쌓여 있고, 작은 식당에선 해녀가 직접 요리한 국이나
생선구이 일품이다.
프랜차이즈 카페는 없지만, 직접 만든 테이블과 도자기를 파는 카페는 있다. 오히려 이런 공간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는 청년 창업자들이 들어와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작은 식당, 공방, 갤러리를 열고 있다.
여행자가 단지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작은 일원처럼 머물다 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두 섬 사이에 흐르는 ‘느림’이라는 공통점
보길도와 노화도는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섬이지만, 그 중심에는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 속도를
늦추는 여행.
이곳에서는 뭔가를 빨리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천천히, 오래 머무는 시간이 더 많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비워내는 법’을 배운다.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리고, 파도가 부딪치는 이 반복적인 움직임 속에서 생각이 정리된다.
누구와 함께 가도, 혹은 혼자 가도 불편하지 않다. 소란하지 않아 마음을 다독이기 좋고,
섬사람들의 친근함은 낯선 여행자에게도 따뜻하다.
요즘은 ‘느린 여행’이란 말이 많이 쓰이지만, 그 진짜 의미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두 섬을 추천한다.
시간표에 쫓기지 않고, 다 봐야 한다는 강박 없이 머물다 오는 여정. 그런 여정이, 지금의 우리에겐
더 필요한 것 아닐까.
굳이 바쁜 여행이 아니어도 괜찮은 이유
여행이 항상 화려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걷기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
보길도와 노화도는 그런 시간의 장소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은 섬. 말보다는 침묵이,
움직임보다는 정지가 더 어울리는 섬.
자연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나란히 흐르는 그곳에서, 한 번쯤은 멈추고 쉬어갈 필요가 있다.
조용한 풍경 속에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여정. 그 시작을 완도에서 해보는 건 어떨까.